감각의 온도 - Park Jung Hyuk

Criticisms

감각의 온도

2018

임은신

작가가 작업을 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누군가는 뚜렷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있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작업을 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작업을 한다. 또 어떤 누군가는 그냥 막연하게 작업하고 싶어서 - 그리고 싶어서, 만들고 싶어서, 그러니까, 쏟아내야 할 어떤 필요에 의해서 작업을 한다.
 
어쨌든, 작가는 어떤 이유에서건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시각적-이미지-이든, 혹은 언어적이든, 음악적이든, 무엇이든, 어쨌든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어떤 무엇으로 만들어 선을 보인다. 과거에는 사실 '작가'라고 하면 보통은 글을 쓰는 사람 - Writer를 의미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시각예술가, 그러니까 눈으로 보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작가라고 부른다. 어떤 면에서는 아티스트 Artist를 한문으로 풀어낸 말이다.
 
이전 시각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작가 혹은 아티스트라기 보다는 그들의 전문 분야를 콕 집어 불렀었다. 그러니까, 화가-그림을 그리는 사람, 조각가 - 조각(입체작업)을 하는 사람, 판화가, 사진(작)가 등등. 때로는 화가도 동양화가, 서양화가, 수채화가, 삽화가 등등으로 굳이 전공 분야를 구분하여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이런 '장르'를 통한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많은 작가-아티스트-시각예술가들이 한 가지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회화이든, 조각이든, 설치든, 영상이든, 그 어떤 무엇이든,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매체를 선택하여, 혹은 자신의 메세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매체를 선택하여 작업하는 것이다. 박정혁PARK Jung Hyuk은 바로 그런 작가 중 대표적인 한 사람이다.

명문예고와 미대(선화예고와 홍익대학교 회화과)라는 우리나라에서 '화가'로 살아가기 위한 소위 엘리트 코스 밟은 박정혁은 뜻밖에도 회화가 아닌 영상(미디어) 작업에 집중하고, 그리고 그 작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가 지금까지 발표한 작업 내용들을 살펴봤을 때 어쩌면 이는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작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첫 개인전 《부정교합》 에서 선보인 비디오 작업 〈training〉에서 잘 드러난다.


〈training〉, 2003, 단채널 영상, 6분 13초 ©Artist

그의 화두는 다름 아닌 사회의 구조적 권력 문제와 훈육(교육과는 다른 의미의 '훈육'임에 주목하자)이다. 작가는 강아지 두 마리를 간식으로 약 한 달간 훈련한 모습을 촬영한 짧은 영상을 통해 그 안에서 권력의 발생과 소비, 그리고 만들어진 권력구조가 뜻밖으로 견고하지 못함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훈육이 분명 효과는 있지만 그 대상이 어떤 계기에서든 저항하고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가능하다는 메세지도 함께 전달한다.
 
그렇게 박정혁은 꽤 오랫동안 다양항 영상 및 설치작업을 통해 훈육과 교육에서 시작되는 권력구조의 발생과 그 결과를 가족관계와 사회문제로 확장, 발전시키며 미디어 작가로서 주목받았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고발하고 이를 개선하는데 크든 작든 하나의 역할을 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작가는 굳이 이러한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는 사회의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작품으로 발언하는 것이 작가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해야 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행동의 실천이 모여 구조적으로 내면화 되는 사회적 모순의 흐름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며 그러한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은 작가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혁, 사회적 모순에 대한 미술적 표현 연구 - 본인 작품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석사학위논문, 2012, p.42
 

그러다가 작가는 2007년 ‘Park's Park’ 시리즈로 돌연 회화painting 작업으로 돌아오는데, 이 또한 범상치 않다. 이제까지 개인사와 가족사를 중심으로 다소 미시적으로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았던 작가는 이제 회화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매체로 돌아와 자신이 속해 있는 이 시대를 보다 확장된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Park's Park〉, 2007-2013, 캔버스에 아크릴, 130 x 70 cm ©Artist

사회 안의 '나'의 시선에서 '나'의 경험에서 시대를, 사회를 이야기 했다면 조금 더 눈을 멀리 돌려 거시적 시선으로, 한걸음 물러서 내가 속해 있는 우리, 사회, 시대를 바라본다. 시각적인것-이미지에 예민한 시각예술가로서,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들 - 영화, 방송, 잡지, 광고 등에 주목한다.
 
21세기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이미지들은 감각적이고 화려하면서 자극적이고 때로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폭력적이다. 무엇보다도 무수한 이미지들이 대부분 상업적이며, 따라서 욕망을 이야기한다.

 
“범람하는 미디어의 물결은 수많은 이미지를 쏟아내며 흐르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 욕망의 대체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생산된 이미지는 실은 간편하게 발언자들의 욕구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지배 수단이다. 이에 작가는 이미지들의 재조합을 통하여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든 후 소심한 반란을 준비한다”- 2009년 7월, 작가 노트 중에서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재조합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내러티브narrative를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원하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내러티브를 정확하게 읽어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접할 때 이를 해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존의 경험과 교육된 상징들을 불러내려 애쓰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Park's Park’은 어떠한 주제를 숨겨 놓고 이야기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화면의 구성에 의의'를 둔 작업이다. 따라서 늘 주어진 이미지들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정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는데 익숙한 관객들에게 이 작품은 난해하고 어쩌면 허무하게 다가갈 수도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회화적 '전략'을 “이미지의 기표와 기의를 분리시켜 관객들의 교육된 도상학적 해석을 교란시키고자 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의 ‘Park's Park’ 시리즈는 실제로 거대한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까지 보아왔던 많은 역사화들과 비슷한 극적 구성을 보여주는 이 작업은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을 것 같은 제목과 더불어 우리를 충분히 교란시킨다. 흔히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아는 만큼 보인다고들 하지만, 결국 아는 것 때문에, 아는 만큼만 볼 수 밖에 없는 그런 모순에 우리를 갇아 두는 것이다.
 
결국 “학습되어 내면화된 방식으로만 대상을 해석하고자 하는 모순을 이용하여 미술계 상황을 조롱하고, 사회가 예술가의 역살이라고 규정 지은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동적 표현”이라는 작가의 의도는 멋지게 들어 맞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나만의 서사를 만들어내고 읽어내는 것은 또한 분명히 우리의, 관객의 몫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미술을 소비하면서 맛볼 수 있는 매력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오늘, 박정혁이 우리 앞에 꽤 오랜만에 새로운 작업, ‘Park's Memory’를 내놓았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선보이는 신작들은 기존의 그의 작품들과 비슷한 듯 하면서 낯설다. 기존의 그의 작품들에 비해 낯설 뿐만 아니라, 기존의 회화작업들과 비교해서도 낯설다.
 
흔히 보는 캔버스가 아니라 내 얼굴이 비쳐지고 또 하늘거리기까지 하는 은박 비닐이다. 캔버스의 평범함과 진부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작가는 우연히 과자나 라면 같은 것을 포장하는 은박포장지보다 살짝 얇은 은박비닐을 발견했고, 이 위에 이미지들을 그리기로 했단다.


《Park's Memory - 감각의 온도》전시 전경 ©도로시살롱

사실 우리 얼굴이 비칠 수 있는 매체에 작업을 하는 것은 박정혁이 처음은 아니다. 회화든, 조각이든 우리는 거울을 이용한 조형작품들을 꽤 많이 보아왔다. 그러니까, '반영'을 이용할 수 있는 매체로 거울은 제법 일반적인지라 상대적으로 위험요소가 적다. 그리고 단단하다. 작가는 그런 거울과 자신이 이번에 선택한 은박비닐이 달리 보여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다르다. 가장 큰 다른 점은 바로 '왜곡' 이다.
 
거울과 달리 단단한 고형이 아닌, 솔리드Solid 하지 못한 은박비닐은 반영되는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매끈한 평면에 완벽하게 접착하지 않는한, 얇은 은박비닐이라는 바탕은 작게든 크게든 대기에 의해 굴곡이 생성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더불어 거울과는 다른 밀도와 투명도로 형상을 분명하게 반영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은박비닐을 거울로 이용하지 않는 이유일테다. 그렇기에 이 얇고 찢어지기 쉬운 은박비닐은 ‘Park's Memory’의 주제와 잘 맞아 떨어진다.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듯, 이것은 “기억”에 대한 작업이다.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여러 각도에서 고발하고 고민했던 작가는 갑자기 왜, 어떻게 “기억”이라는 소재로 우리 앞에 돌아왔으며, 그가 보여주는 기억은 어떤 모습일까.
 
많은 작가들이 “기억”에 대한 작업을 한다. “기억”이라 함은 사적인 것일 수도 있고, 공적인 것일 수도 있다. 언어적인 것일 수도 있고, 형상(이미지)적인 것일 수도 있다. 시작적인 것일 수도 있고, 청각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후각적, 미각적, 그리고 촉각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오감을 동원하여 기억을 한다.
 
그러나 이 기억에는 치명적인 결함이자 장점이 있으니, 바로 불완전성이다. 그리고 박정혁은 이 기억의 불완전성에 주목한다. 기억은 불완전하다. 어쩌면 혹자는 아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다. 어떤 사항, 상황에 대하여 분명히 기억할 수 있다, 라고 반박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자. 분명한 기억,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 어디까지 분명한 기억일까. 기억은 언제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선택적이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왜곡된다. 작가는 우리가 어떤 것을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순간 이미 기억의 왜곡은 시작된다고 본다. 사실이다. 기억하려는 행위를 하는 순간의 많은 것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것에 겹쳐진다. 그리고 기억의 왜곡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과거의 무엇을 기억해내기 위하여 역순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그 과정에서 기억에 기억이 더해진다. 그러다보면 과거의 어떤 것은 그 당시의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그 어떤 것에 이것 저것을 더하고 또 (본의아니게) 지워서 기억해낸, 본래의 것과는 달라진 또 다른 어떤 것이다. 그 어떤 것은 기억에 의해 아주 조금만 변형되었을 수도 있고, 또 아주 많이 변형되었을 수도 있다.


《Park's Memory - 감각의 온도》전시 전경 ©도로시살롱

그리고 박정혁의 ‘Park's Memory’는 바로 이 과정을, 우리가 기억하고 기억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더하고 지우는 행위와 그로 인해 불완전하고 불분명해지는, 모호해지는 기억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미지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기억하는 것은, 그것을 그 순간에 어떤 방법으로든 머릿 속에 입력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았든, 귀로 들었든, 코로 냄새를 맡았든, 입으로 맛을 보았든, 피부로 감촉을 느꼈든, 혹은 이 다섯가지 감각을 한꺼번에 모두 느꼈든 우리는 오감을 이용하여 어떤 것을 입력하고, 기억한다.
 
처음에는 나름 “있는 그대로” 입력되었을 어떠한 정보. 이것은 마치 작가가 은박비닐 위 화면에 분명하게 그려낸 밑그림과 같다. 처음에는 분명하게 그려지고 반영 reflet되었지만, 사실은 그 바탕 자체가 견고하지 못해서 이미 왜곡되기 시작하는 이미지. 그리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이미지는 여러 다른 이미지들이 더해지고, 또 지워져서 어느 순간 또렷해졌다가 또 다시 흐릿해졌다가를 반복하며 커다랗고 방대한 기억의 군상을 만들어낸다. 세월에 흐름에 따라 겹겹이 쌓인 기억의 레이어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새로운 이미지, 기억의 군상은 낯설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여 알듯 말듯 아리송하다.
 
박정혁이 그리는 이러한 왜곡되어가는 불완전한 기억의 이미지들, ‘Park's Memory’는 제목에서도 시사하듯 분명히 작가 개인의 사적인 기억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 중에는 우리가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이미지들도 제법 많이 보인다. 그가 수없이 겪은 기억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는 지극히 사적인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의 기억 속을 함께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런 기억들에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같은 시대, 같은 사회를 살아가며 겪었던 유사한 경험들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와 함께 한 세월이 오래된 그의 가족이나 지인들은 이번 작업에서 일반 관객보다는 더 많은 기억을 찾아내고 공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대로 작가와 어떤 사적 관계 없이도 어쩌면 그의 어떤 기억에서 자신의 기억을 찾아낼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물며 허구인 소설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내 삶의 경험을 반추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적 기억과 공적 기억, 사적 경험과 공적 경험 사이의 거리가 의외로 그렇지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며,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번 박정혁이 그려낸 이미지 군상 안에서, ‘Park's Memory’ 안에서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만의 서사를 찾아내고 읽어내게 된다. 작가가 장치해 둔, 희미하게 일렁이는 갸냘프고 얇은 은박비닐 위에 뿌옇게 투영되는 기억 안에서 말이다.


《Park's Memory - 감각의 온도》전시 전경 ©도로시살롱

7년만에 선보이는 이번 개인전《Park's Memory - 감각의 온도》에서 박정혁은 처음으로 영상이나 설치 없이 회화만으로 이야기한다. 과거의 작업에서 보여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에 대한 메세지도 상대적으로 덜 강렬하고 절 직접적이다. 아니, 아주 꼭꼭 숨겨두었다.
 
이런 작가의 변화에, 이런 화법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각자의 감각의 온도에 맡겨 본다. 각자의 온도에 맞게, (그러나 아마도 어떤 방식대로든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훈육된) 각자의 감각으로 느끼고 읽어보자. 아니, 어쩌면 읽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이 기억을, 이미지를 감각하고 공감하고 또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백년 만의 폭염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있는 2018년의 여름, 도로시 살롱이 8월 기획전으로 마련한 박정혁 개인전《Park's Memory - 감각의 온도》를 통해 작가가 층층이 쌓아 놓은 기억의 레이어 속으로 함께 들어가 쉽게 스쳐보냈던 우리의 기억과 감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느끼는 나만의 '그림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져 보길 뜨겁게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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